포장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진화할 뿐이다

탄소중립 시대, 심진기 센터장이 말하는 '패키징의 역할과 미래 기술'

"포장은 단 한 번 사용되지만, 하루에도 수십억 개가 만들어지고 버려집니다."

심진기 한국생산기술연구원 패키징기술센터장이 던진 이 말에는 묘한 역설이 담겨 있다. 우리가 매일 뜯어서 버리는 그 포장재가, 사실은 글로벌 경제를 떠받치는 숨은 주역이라는 것이다.

택배 상자를 뜯으며 "또 과대포장이네"라고 투덜거리던 소비자들도, 이제는 그 포장재 하나하나가 탄소발자국을 남긴다는 걸 안다.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2026년부터 본격 시행되는 과대포장 규제 앞에서, 포장은 더 이상 '마지막에 생각할 문제'가 아니게 됐다.

포장이 전면에 나선 이유

사실 포장이 이렇게 주목받는 건 처음이다. 그동안 포장은 늘 뒷전이었다. 제품이 완성되면 그때서야 "어떻게 포장할까?" 고민하는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다. 환경 규제가 강화되면서 포장이 기업 경영의 핵심 이슈로 떠올랐고, 동시에 기술 발전으로 포장 자체가 '똑똑해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물건을 싸는 역할을 넘어, 제품을 보호하고 정보를 전달하며 심지어 소비자와 소통하는 매개체로 진화하고 있다.

심 센터장은 이런 변화를 두 갈래로 설명한다. 하나는 액티브 패키징이고, 다른 하나는 인텔리전트 패키징이다. 이름이 좀 거창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리 주변에서 이미 쓰이고 있는 기술들이다.

액티브 패키징: 포장재가 일을 한다

액티브 패키징은 말 그대로 '능동적인' 포장이다. 그냥 덮어두는 게 아니라, 포장재 자체가 내용물을 적극적으로 보호한다.

가장 쉬운 예가 마트에서 파는 육류 포장이다. 고기를 담은 플라스틱 용기 안에 특수 가스를 넣어서 산화를 막고 신선도를 유지한다. 이게 MAP(Modified Atmosphere Packaging)라는 기술인데, 이미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고 있는 액티브 패키징의 대표 사례다.

"고기가 상하는 건 공기 중 산소 때문이에요. 그래서 산소 대신 질소나 이산화탄소를 넣어주면 훨씬 오래 보관할 수 있거든요." 심 센터장의 설명이다.

이런 기술이 점점 정교해지고 있다. 포장재에 산소 흡수제를 내장하거나, 항균 성분을 입혀서 세균 번식을 막기도 한다. 심지어 습도를 조절하는 포장재도 나왔다. 포장재가 그냥 '포장지'가 아니라 '보관 시스템' 역할을 하는 셈이다.

인텔리전트 패키징: 포장재가 말을 한다

인텔리전트 패키징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포장재에 센서를 달아서 내부 상황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한다. 온도가 올라가거나 습도가 변하면 알려주고, 심지어 제품이 언제까지 신선한지도 알려준다.

"특히 의약품 분야에서 이런 기술이 중요해요. 유전자 치료제 같은 경우 한 번에 몇억 원씩 하는데, 온도가 조금만 틀어져도 약효가 사라져 버리거든요."

실제로 콜드체인 물류에서는 이미 이런 스마트 패키징이 활용되고 있다. 백신이나 바이오의약품을 운송할 때, 포장재에 붙은 센서가 온도 변화를 감지해서 실시간으로 알려준다. 문제가 생기면 즉시 대응할 수 있다.

배터리가 필요 없는 센서 기술도 나왔다. 포장재 자체에서 전기를 만들어내는 나노 기술을 쓰는 거다. 작은 진동이나 온도 변화로도 전기를 생산할 수 있어서, 별도의 전원 없이도 센서가 작동한다.

현장에서 벌어지는 변화들

이런 기술들이 실험실에만 있는 건 아니다. 이미 다양한 분야에서 실용화되고 있다.

LG전자는 스티로폼 대신 골판지로 냉장고를 포장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종이인데도 1톤 무게를 버틸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 환경에도 좋고 재활용도 쉽다.

화장품 업계에서는 '무용기형' 포장이 뜨고 있다. 공기가 들어가지 않게 설계해서 제품을 끝까지 깨끗하게 쓸 수 있다. 용기 안에 스프링도 없애서 재활용하기도 편하다.

삼양식품은 불닭볶음면에 위조 방지 포장을 적용했다. 특수 필름을 써서 가짜 제품을 구별할 수 있게 한 거다. 해외에서 인기가 높다 보니 짝퉁이 많이 나와서 도입한 기술이다.

일본에서는 더 재미있는 사례도 있다. 커피캡슐을 생분해 소재로 만들어서 그대로 화분에 묻으면 분해되는 제품이 나왔다. 태국에서는 종이로 여러 층을 쌓아 올릴 수 있는 포장재를 개발해서 창고 효율을 높였다.

규제가 만든 새로운 게임

이런 혁신들이 나오는 이유 중 하나는 규제 때문이다. 2026년부터 본격 시행되는 과대포장 규제는 단순히 벌금을 물리는 게 아니라, 아예 비즈니스 모델을 바꿔야 하는 상황을 만들고 있다.

"제품 부피 대비 포장재 비율을 정확하게 측정해서, 기준을 넘으면 최대 300만 원까지 과태료를 물게 돼요. 이커머스 업체들한테는 꽤 부담스러운 금액이죠."

더 중요한 건 EU의 움직임이다. 순환경제 패키지를 통해 포장재 최소화, 재활용률 향상, 소비자 교육까지 종합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유럽으로 수출하는 기업들은 이미 대응에 나섰다.

하지만 규제만 보고 대응하면 놓치는 게 있다. 포장이 이제 단순한 비용이 아니라 경쟁력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전략이 된 포장

"포장은 이제 제품의 마지막 옷이 아니라 전체 시스템의 일부예요."

실제로 포장은 여러 측면에서 기업 경쟁력에 영향을 준다. 우선 물류비다. 포장을 10% 줄이면 운송 효율이 15% 이상 올라간다. 같은 트럭에 더 많은 물건을 실을 수 있고, 창고 공간도 절약된다.

정보 수집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스마트 포장재에서 나오는 데이터로 제품 상태를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다. 어느 구간에서 문제가 생겼는지, 고객이 언제 제품을 받았는지까지 알 수 있다.

무엇보다 고객 경험이 달라진다. 요즘 소비자들은 '언박싱' 경험을 중시한다. 포장을 뜯는 과정 자체가 브랜드 경험의 일부가 된 거다. 특히 온라인 쇼핑에서는 포장이 제품과의 첫 만남이니까, 그 중요성이 더 크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포장 기술은 계속 진화할 것이다. 액티브 패키징과 인텔리전트 패키징이 결합되면서 더 똑똑하고 다기능적인 포장재가 나올 예정이다.

심 센터장은 "앞으로는 포장재가 제품의 연장선이 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단순히 보호하는 역할을 넘어서, 제품의 기능을 확장하고 사용자와 지속적으로 소통하는 매개체가 된다는 뜻이다.

이미 그런 징조들이 보인다. 포장재가 그대로 보관용기가 되는 제품들이 나오고 있고, 포장재에서 나오는 데이터로 개인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시도들도 시작됐다.

하지만 기술만으로는 부족하다. 결국 사람이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관건이다. 포장을 단순한 규제 대응 수단으로 보는 기업과, 경쟁력의 새로운 원천으로 보는 기업 사이에는 점점 더 큰 격차가 벌어질 것이다.

마지막 질문

심진기 센터장과의 대화를 마치며 든 생각이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포장을 너무 단순하게 봐왔던 게 아닐까?

포장은 분명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물건이 있는 한, 그것을 보호하고 전달하는 수단은 필요하니까. 하지만 그 모습은 계속 바뀔 것이다. 더 지능적이고, 더 친환경적이며, 더 전략적으로.

이제 물어볼 차례다. 당신의 포장은 준비됐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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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안내
본 내용은 심진기 한국생산기술연구원 패키징기술센터장의 인하대학교와 한국무역협회가 공동 운영하는 물류 최고경영자 과정 GLMP에서 발표한 자료를 기반으로 비욘드엑스가 재구성한 전략 백브리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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