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류가 공간을 삼키고 있다. '동선'에서 '흐름'으로
연재: 물류·공간·일상의 재편을 말하다(제1화)
도시는 오랫동안 '동선'으로 설계되어왔다.
사람과 차량이 이동하는 경로, 상점과 주거지를 연결하는 축, 출근과 퇴근, 등하교와 통근처럼 반복되는 일상의 리듬 속에서 도시의 동맥은 구축되었다.
그러나 지금, 도시 공간에서 벌어지는 변화는 과거의 연장선이 아니다.
그것은 '동선'이 아닌, '흐름(flow)'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보여준다. 음식, 상품, 서비스가 실시간으로 이동하고, 사람은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
도시는 더 이상 사람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물류가 흐르고 있다.
공간을 바꾸는 물류의 흐름
도시의 풍경은 빠르게 바뀌고 있다. 가장 먼저 감지되는 변화는 골목, 교차로,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시작된다. 새벽에 도착한 택배 상자들이 출입구에 늘어서고, 반복적으로 오가는 오토바이, 전동 킥보드, 로봇 배송을 실증 중인 소형 자율주행차들까지. 배송과 배달은 더 이상 부차적인 기능이 아니다. 일상 그 자체가 되었다.
한국의 배달 시장은 이러한 변화를 수치로 증명한다. 2020년 전국 배달 시장 규모는 전년 대비 17조 3,371억원으로 급증했다. KDI 경제정보센터 분석에 따르면, 코로나19 유행 시기 배달 앱 이용 건수는 29%, 이용 금액은 35% 증가했다. 이는 단순한 시장 확대가 아니라 도시 공간 활용 방식의 근본적 변화를 의미한다.
서울시만 봐도 이러한 변화는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다크스토어(배민B마트, 쿠팡이츠마트 등 배송 전용 매장)는 급속히 확산되고 있으며, 주요 거점을 중심으로 라스트마일 물류 처리를 강화하고 있다. 쿠팡의 로켓프레시는 서울 전역과 수도권을 포함해 전국으로 커버리지를 확대했고, 오아시스는 수도권 중심에서 전국 주요 도시로 새벽배송 서비스 영역을 넓히고 있다.
아파트 단지 내부 구조도 변화하고 있다. 과거에는 택배 차량이 지상까지 진입해 자유롭게 배송할 수 있었지만, 최근 신축 아파트의 경우 보행 중심 단지 설계와 층고 제한 등으로 인해 지하 차량 진입이 어렵다. 이에 따라 일부 단지에서는 로봇 배송이나 스마트 보관함 등 새로운 형태의 물류 대응 설계가 도입되고 있다. LH, SH공사, 대형 건설사들은 분양 설계지침에 '택배 차량 대응 설계'를 명문화했으며, 엘리베이터 호출 API 연동, 출입 보안 시스템 개선 등을 통해 향후 배송 자동화를 위한 인프라를 구축 중이다.
수치로 보는 도시의 재편
도시 내 공간 재편은 추상적 개념이 아닌 실증적 현실이다. 다음 데이터들은 2020년 이후 도시와 물류의 관계가 어떻게 진화했는지를 보여준다.
■ 검증된 변화 지표:
-. 전국 배달 시장 규모: 2019년 2조 7,326억원 → 2020년 17조 3,371억원 (535% 증가)
-. 코로나19 시기 배달 앱 이용 건수: 29% 증가
-. 코로나19 시기 배달 앱 이용 금액: 35% 증가
-. 30대 및 1인 가구 비중이 높은 지역에서 배달 수요 집중 현상 심화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교통 패턴의 변화다. 배달 수요가 높은 지역을 중심으로 이륜차 교통량이 급증했고, 이는 기존 교통 체계에 새로운 도전 과제를 제기하고 있다. 단순한 '빠름'을 넘어 '공간의 재구성'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 세 장의 지도는 도시를 바라보는 기준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첫 번째 지도는 지역별 인구 밀집도를 나타냅니다. 과거 도시 설계는 이처럼 '사람이 얼마나, 어디에 모여 사는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사람이 많은 곳에 도로가 깔리고, 학교와 병원이 들어섰으며, 주거와 상업 시설이 배치되었습니다.
두 번째 지도는 새벽배송이 가능한 권역을 보여줍니다.단순히 인구가 많은 곳만이 아니라, 물류 거점(TC)과 배송 루트를 최적화할 수 있는지 여부가 중요해졌죠. 플랫폼 기업들이 물류 효율을 기준으로 도시 공간을 재설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세 번째 지도는 택배 사각지대, 즉 배송 서비스에서 소외된 지역을 나타냅니다. 물류망이 미치지 않는 지역은, 사람이 살고 있어도 '배송 불가능' 지역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는 곧, 도시 설계가 더 이상 사람만을 기준으로 하지 않으며, 데이터와 공급망 최적화가 새로운 기준이 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세 지도를 함께 보면, 도시 설계의 주체가 점점 건축가에서 플랫폼으로, 기준이 거주 가능성에서 배송 가능성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상의 공간에 들어온 물류 플랫폼
도시를 바라보는 시선은 이제 '거주 가능성'이 아니라 '배송 가능성'으로 이동하고 있다. 단지 내 피킹 가능 여부, 지하주차장 진입 허용 여부, 배송박스 임시 보관 공간 유무 등이 플랫폼 운영의 핵심 요건이 되었다.
실제로 배민B마트는 초기에 신축 상가 위주로 다크스토어를 구축했지만, 이후에는 1층 피킹 전용공간을 따로 구성하거나, 물류 효율을 우선으로 상권을 재설계하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2024년 배민B마트는 처음으로 흑자를 달성했다고 발표했는데, 이는 물류 중심 공간 설계의 효과를 보여주는 사례다.
오아시스는 수도권에 TC(물류집하장)를 배치해 새벽배송을 위한 고정 배송 루트를 구성하고 있으며, 엘리베이터 연동 시스템과 단지 출입 보안 연계도 아파트 관리사무소와 협의해 구축 중이다. 쿠팡은 자사 CFC/FC 물류망과 라이더 네트워크를 통합하여 라스트마일 구조를 자체적으로 완결시키는 구조(C2H)를 고도화하고 있다.
플랫폼에게 공간은 더 이상 '사용하는 곳'이 아니라 '제어할 수 있는 네트워크 단위'다. 도시의 평면도는 점차 물류 동선과 처리량, 데이터 흐름에 따라 재편되고 있다.
공간이 다시 설계되는 방식
서울시와 국토교통부는 스마트시티 고도화 로드맵에서 '생활물류 거점 확보'를 주요 과제로 내세우고 있다. 이는 정부 차원에서도 물류 중심 도시 재편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의미다.
서울시 도시계획국은 유휴부지와 지하공간, 상가건물 일부를 활용해 마이크로 물류 거점으로 전환할 수 있는 정책 패키지를 준비 중이며, 세종시, 김포시 등 신도시는 아예 단지 설계 단계에서부터 생활물류를 포함한 스마트 인프라를 기본값으로 삼고 있다.
예를 들어, 서울 중구는 퇴계로 인근에 로봇 주행 테스트베드와 연계된 소형 복합물류 거점 설립을 계획 중이며, 세종시는 아파트 단지 내 쓰레기 수거·분류·회수 시스템과 배송 인프라를 결합한 스마트 회수 솔루션을 시험 중이다. 이는 곧, 도시의 '배출 동선'마저 물류화되고 있다는 뜻이다.
일부 지자체는 물류·폐기물·식자재·의료·편의시설 등을 통합한 생활물류 복합시설을 기획하고 있으며, 민간 스타트업과의 협업으로 스마트 보관함, 포장재 회수 스테이션, 탄소중립형 배송 허브 등의 실증도 본격화되고 있다.
변화의 체감
"배달이 빠르긴 한데, 엘리베이터 기다리는 시간이 더 걸려요." — 서울 강서구 주민 인터뷰
"단지 내 포장재가 너무 많아서 쓰레기장이 감당이 안 됩니다. 포장재를 한 번에 회수해주는 시스템이 있으면 좋겠어요." — 서울 마포구 아파트 관리소장
"플랫폼 입장에선 단지 구조가 중요합니다. 피킹 위치, 엘리베이터 위치, 진입 가능 차량 크기, 보안 출입 방식이 물류 효율에 큰 영향을 줍니다." — 배달 플랫폼 운영자
배달의 속도는 늘었지만, 공간의 피로도도 함께 증가하고 있다. 생활자는 '빠름'을 원하지만, 그 이면의 구조적 압박을 체감한다. 플랫폼은 효율을 위해 공간을 정밀하게 분석하고, 설계한다. 도시 공간은 점점 더 고정된 무대가 아니라 유동하는 물류의 흐름을 수용하는 구조체로 변모하고 있다.
물류 최적화 도시
현재 진행되고 있는 변화들을 토대로 예측해보면, 향후 도시 설계는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이다. 거주 목적의 공간이 아니라, '물류 최적화'를 위한 알고리즘으로 설계된 도시 단지가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엘리베이터는 상품과 사람의 흐름을 동시에 고려해 배치되고, 주차장에는 전기 배송차와 드론 픽업존이 함께 위치할 것이다. 거실 옆 벽에는 '리턴 박스(return box)'가 있어, 반품할 물건을 넣기만 하면 로봇이 수거해 간다. 냉장 택배를 위한 '스마트 쿨러 룸'이 1층에 마련돼 있고, 모든 단지 입구는 '수요예측 기반 배송시간표'에 따라 열리고 닫힌다.
이는 단지의 '생활 효율'을 높이기 위한 게 아니라, 플랫폼의 '공급망 안정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설계다. 주민의 동선보다는 상품의 흐름이 먼저 고려되는 공간. 우리가 아는 아파트가 아닌, 물류망의 노드로 작동하는 주거지. 상상 속 이야기 같지만, 이미 현실은 그 초입에 들어섰다.
쿠팡은 자체 Fulfillment Center(물류센터)를 도시 외곽에 구축하고, 이를 중심으로 라스트마일 거점을 도심 안쪽에 다크스토어 형태로 배치하고 있다. 오아시스마켓은 반찬, 육류, 유제품 등을 자체 브랜드(PB)로 구성하고, TC(물류 허브)에서 포장 후 새벽배송으로 직집배를 진행한다. 이 구조는 공급부터 유통, 배송까지 모든 체인을 '물류 설계' 관점에서 접근한 결과다.
'건축가'와 '공급망 디자이너'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있다. 공간의 미학이나 주거의 쾌적함보다, 데이터로 설계되는 물류 흐름이 도시의 형태를 정의한다. 도시는 점점 더 물류 친화적 플랫폼이 되고 있다.
도시의 설계자가 바뀌고 있다
도시의 모습은 누가 설계할까? 과거엔 그 답이 명확했다. 건축가, 도시계획가, 공무원, 개발사였다. 그러나 오늘날, 공간의 주도권은 플랫폼이 가져가고 있다. 입지와 단지를 설계하고, 소비자 동선을 예측하며, 아파트 단지까지 '배송 친화적'으로 다시 그리는 존재들. 바로 플랫폼 기업들이다.
다음 연재에서는 이 질문을 던져본다. "건설사는 왜 플랫폼이 되어야 하는가?"
건설과 물류, 공간과 데이터가 맞닿는 새로운 프론티어. 그 최전선을 파헤친다.
[연재 순서] 물류·공간·일상의 재편을 말하다
프롤로그 「아마존이 우리 동네에 아파트를 설계하기 전에」
제1화 「물류가 공간을 삼키고 있다: '동선'에서 '흐름'으로」
제2화 「"도시의 설계자가 바뀌고 있다" 건설사는 플랫폼으로」
제3화 「"건설사는 무엇을 설계해야 하는가" 플랫폼 도시의 카운터파트로」
지금 무료 회원 가입하고, 모든 전략 콘텐츠를 전문 열람해보세요. 후원 계좌: 하나은행 189-910044-05704 (예금주: 비욘드엑스)
© 2025 BEYONDX. All rights reserved. This is part of the STREAMLINE: Beyond Logistics Playbook by BEYONDX ser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