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사는 무엇을 설계해야 하는가? 플랫폼 도시의 카운터파트로
연재: 물류·공간·일상의 재편을 말하다 (제3화)
배달로봇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현관 앞까지 배송하는 동안, 오토바이 배달원은 지하 화물 승강기를 이용해야 하는 현실. 이는 단순한 기계와 인간의 우선순위 문제가 아니다. 기술이 도시 설계의 프레임을 바꾸고, 인간의 동선과 경험이 그에 맞춰 재조정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 도시 설계의 주도권 변화
지난 5년간 쿠팡, 배달의민족, 카카오택시가 우리 도시의 동선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새벽 3시에도 빛나는 쿠팡 물류센터, 골목골목 누비는 배달 오토바이, 언제 어디서든 잡히는 택시. 편리함 뒤에 숨은 질문이 있다. 이 흐름이 정말 인간 중심인가, 아니면 플랫폼 중심인가?
플랫폼 기업들은 '거점-데이터-동선'이라는 새로운 언어로 도시를 재구성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변화가 일방적이라는 점이다. 플랫폼은 자신들의 효율성을 위해 도시 공간을 재편하고, 시민들은 그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 건설사들마저 플랫폼의 요구에 맞춰 건물을 짓고 공간을 설계한다.
이런 종속적 관계가 지속된다면 도시는 사람이 아닌 알고리즘을 위한 공간이 될 위험이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플랫폼의 효율성을 인정하면서도 인간 중심의 도시 가치를 지켜나가는 '대안적 설계 언어'다. 그리고 이 언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주체가 바로 건설사다.
■ 도시 운영체제의 설계자로 전환
건설사는 더 이상 '건물 짓는 회사'가 아니다. 플랫폼 시대에 건설사는 '도시 경험을 설계하는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 이는 단순히 기술을 도입하는 것을 넘어, 도시 내 모든 활동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시스템을 설계하는 일이다.
배송, 쓰레기 처리, 이동, 주거, 상업 활동이 분리된 개별 영역이 아니라 하나의 연결된 시스템으로 작동하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건설사의 새로운 역할이다. 플랫폼 기업들이 각자의 서비스 효율성만 추구한다면, 건설사는 물리적 설계자를 넘어 '도시 운영체제(Urban Operating System)'의 설계자로 전환해야 한다.
SK에코플랜트는 스마트홈 기반의 에너지 효율화 설계를 통해 단지 차원의 통합 시스템을 시도하고 있다. 삼성물산은 '홈닉' 플랫폼을 통해 5G 기반의 스마트홈 기술을 실험 중이며, 통신사·건설사 간 협업 사례가 산업 전반에서 늘어나고 있다. 중요한 것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기술을 통해 만들어내는 '새로운 도시 경험'이다.
■ 새로운 설계 언어의 필요성
플랫폼 시대의 건설사는 완전히 새로운 설계 언어를 배워야 한다. '배송 가능성', '자율주행 동선', '디지털 트윈', '공유형 인프라'가 전통적인 '채광', '통풍', '조망권'과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이제는 벽돌과 창을 넘어, API와 데이터 플로우까지 읽을 줄 알아야 한다.
■ 물류 친화적 설계의 진화
현대건설의 로봇 배송 서비스는 여전히 기존 건물 구조에 기술을 덧씌우는 방식이었다. 이제는 더 진화된 접근이 필요하다. 기존 아파트 설계는 주민의 거주 편의성에 초점을 맞췄지만, 이제는 배송 로봇의 이동 경로, 드론 착륙장, 무인 배송함 위치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
대림산업의 'e편한세상' 브랜드에서는 대형 물품 운반 및 로봇 활용을 고려한 승강기 설계를 통해, 기술과 일상 편의성을 동시에 확보하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기술적 효율성과 주민 편의성을 동시에 만족시키려는 접근이다.
■ 자율주행 시대 대비
자율주행 시대를 대비한 주차 공간 설계도 중요하다. 현재의 주차장은 사람이 차를 주차하고 걸어 나오는 구조로 되어 있지만, 자율주행차 시대에는 차가 스스로 주차하고 필요할 때 호출되는 구조로 바뀔 것이다. 이에 맞춰 주차 공간을 줄이고, 그 자리에 공용 공간이나 상업 시설을 배치하는 새로운 설계가 필요하다.
■ 통합 설계의 실제 사례
세종시 5-1생활권의 실험이 구체적인 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드론 착륙장과 로봇 전용 통로를 확보하는 것을 넘어, '배송-쓰레기 통합 설계'라는 더 진화된 모델을 구현했다. 아파트 단지 내 중앙 집중식 물류허브를 만들되, 이를 주민들의 커뮤니티 공간과 연결한 것이다. 1층은 무인 택배함과 쓰레기 처리 시설, 2층은 주민 휴게 공간과 작은 도서관으로 설계했다.
김포한강신도시의 '보행-물류 분리 설계'도 한 단계 더 발전했다. 지상은 완전히 보행자 중심으로, 지하는 물류 중심으로 설계해 두 영역이 간섭하지 않도록 했다.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안전한 지상 공간과 효율적인 물류 시스템을 동시에 확보한 것이다.
■ 순환경제와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
온라인 쇼핑 급증으로 포장재 쓰레기가 폭증하고 있지만, 이를 단순히 '처리해야 할 문제'로만 보는 것은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2024년 기준 국내 생활 폐기물 중 재활용 가능 비율은 약 61%에 달하지만, 실제 재활용률은 37%에 그치고 있다. 이는 분류 체계와 처리 시설의 효율성 문제를 시사한다.
GS건설은 AI 기반 폐기물 자동 분류 시스템을 실험하고 있다. 주민들이 재질 구분 없이 혼합 배출한 쓰레기를 AI 로봇이 자동으로 분류하고, 재활용 가능한 자원은 별도로 수집해 판매하는 시스템이다. 쓰레기 처리 비용을 줄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수익을 창출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더 나아가 이런 시스템을 아파트 단지 차원을 넘어 도시 전체로 확장하는 것도 가능하다. 여러 아파트 단지의 폐기물 처리 시설을 네트워크로 연결해 효율성을 높이고, 재활용 자원의 거래 플랫폼을 만드는 것이다.
■ 플랫폼과의 대등한 파트너십
건설업계는 여전히 플랫폼 기업들에 '따라가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이제는 이런 수동적 자세에서 벗어나야 한다. 건설사가 플랫폼 기업과 협업할 때 중요한 것은 '대등한 파트너십'을 유지하는 것이다. 단순히 플랫폼 기업의 요구사항에 맞춰 건물을 짓는 하청업체가 아니라, 도시 설계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대등하게 협력하는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
삼성물산과 쿠팡의 협력 방식이 주목할 만하다. 쿠팡이 원하는 배송 효율성과 삼성물산이 추구하는 주거 품질을 모두 만족시키는 설계안을 공동으로 개발했다. 단지 내 마이크로 허브를 설치하면서도, 생활 동선과 충돌하지 않는 설계를 구현한 점은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한 윈-윈 모델의 좋은 예다.
■ 글로벌 사례에서 배우는 인사이트
싱가포르의 캐피털랜드는 '스마트 도시 통합 플랫폼'을 개발해 부동산 개발, 물류 서비스, 소매업을 하나의 생태계로 통합했다. 단순히 건물을 짓는 것을 넘어 도시 생활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종합 서비스 제공자가 된 것이다. 이는 국내 신도시 개발사업에도 적용 가능한 모델이다.
독일의 호흐티프는 '디지털 트윈 기반 도시 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별도 법인을 설립해 도시 계획 컨설팅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전통적인 시공업체에서 도시 설계 컨설팅 업체로 사업 영역을 확장한 사례다. 이는 국내 대형 건설사들의 신사업 진출 방향을 제시한다.
■ 인간 중심 도시는 건설사의 역량에 달려 있다
플랫폼 기업들이 알고리즘의 효율성으로 도시를 재편하고 있다면, 건설사는 인간의 삶의 질을 중심으로 도시를 재설계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기술을 거부하자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인간 중심적으로 활용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자는 것이다.
건설사가 '공간 전략가'가 되어야 할 때다. 물리적 공간을 짓는 것을 넘어, 그 공간에서 펼쳐질 인간의 경험을 설계하는 것이다. 배송 효율성과 주거 편의성, 기술적 혁신과 공동체 가치,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도시의 연결성을 모두 만족시키는 통합적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이런 변화는 건설사에게 새로운 기회가 될 것이다. 플랫폼 기업들이 개별 서비스의 최적화에만 집중한다면, 건설사는 이들을 통합하는 전체 시스템의 설계자로서 더 큰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
결국 미래 도시의 모습은 건설사가 어떤 설계 철학을 갖고, 어떤 기술적 역량을 구축하느냐에 달려 있다. 플랫폼 기업들의 효율성 추구가 도시를 비인간화하지 않도록 하는 것, 그리고 기술의 혜택을 모든 시민이 공평하게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건설사의 새로운 사명이다.
이제 선택의 순간이다. 플랫폼 기업의 하청업체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인간 중심 도시 운영체제의 설계자로 거듭날 것인가. 그 답은 건설사 스스로가 만들어 나가야 한다.
[연재 순서] 물류·공간·일상의 재편을 말하다
프롤로그 「아마존이 우리 동네에 아파트를 설계하기 전에」
제1화 「물류가 공간을 삼키고 있다: '동선'에서 '흐름'으로」
제2화 「"도시의 설계자가 바뀌고 있다" 플랫폼 시대의 건설업」
제3화 「"건설사는 무엇을 설계해야 하는가" 플랫폼 도시의 카운터파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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