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석은 왜 손실을 두려워하지 않는가
쿠팡이 실적을 발표할 때마다 시장은 숫자보다 '김범석의 다음 수'에 더 주목한다. 2025년 2분기 실적 역시 마찬가지였다. 85억 2,400만 달러 매출(전년 동기 대비 16% 성장)과 6분기 연속 흑자라는 성과도 중요하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김범석 의장의 전략적 사고방식이 더 흥미롭다.
이번 실적을 통해 한 가지 실험을 해보고 싶었다. 객관적 지표들을 역추적해 김범석이라는 CEO의 뇌구조를 해부해보는 것이다. 그 결과, 일반적인 이커머스 CEO들과는 확연히 다른 몇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다.
타이밍의 마법사: 언제 손익을 조절하는가
김범석의 첫 번째 특징은 '타이밍'에 대한 독특한 감각이다. 그는 사업을 한 번에 키우지 않는다. 대신 인프라를 '설계→적자→최적화→레버리지'의 단계로 활용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이번 2분기 실적에서 이를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상품커머스 부문의 조정 EBITDA 마진이 9%를 돌파했는데, 이는 새로운 투자 없이 기존 인프라의 효율성을 극대화한 결과다. 총이익률이 전년 동기 대비 230베이시스포인트 개선되어 32.6%에 달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김범석은 컨퍼런스콜에서 "우리 모델은 고정 인프라를 지속적으로 더 큰 규모에서 활용할 수 있게 해준다"고 언급했다. 이는 단순한 규모의 경제가 아니다. 미리 구축해둔 인프라를 '묵혀두었다가' 최적의 타이밍에 활용하는 전략이다. 수천억 원 규모의 물류센터를 미리 지어놓고, 시장이 준비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 번에 가동률을 끌어올리는 방식이다.
쿠팡은 대만을 테스트베드가 아닌 교두보로 봤다
김범석의 두 번째 특징은 '선택과 집중'에 대한 철저함이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대만 전략이다.
2025년 2분기 대만 사업은 놀라운 성과를 보였다. 전분기 대비 54% 성장, 전년 동기 대비 세자릿수 성장률을 달성했으며, 활성고객 수는 직전 1분기 대비 40% 증가했다. 김범석은 "연초 설정한 가장 낙관적인 전망치보다 더 빠르고 강력하게 성장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런데 왜 대만일까? 대만은 김범석에게 '실험장이 아닌 교두보' 였다. 인구밀도(653명/㎢)는 한국의 1.3배로 물류 효율성이 높고, 도시화율 79%로 라스트마일 배송에 유리하며, 연 15%의 이커머스 성장률로 시장 잠재력도 충분했다.
더 중요한 건 문화적 유사성이다. 한국 중소기업들의 대만 진출 성과가 이를 증명한다. 일부 기업의 경우 쿠팡을 통한 대만 매출이 70배, 10배씩 증가했다. 이는 쿠팡이 단순한 유통업체를 넘어 'K-브랜드 수출 플랫폼'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김범석이 일본에서 철수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에게 일본 철수는 실패가 아니라 자원의 전략적 집중이었다. 승률이 높은 곳에 모든 것을 거는 것, 이것이 김범석식 베팅이다.
역설적 투자 철학: 손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김범석의 세 번째 특징은 손실에 대한 독특한 관점이다. 일반적인 CEO라면 손실을 최소화하려 하겠지만, 김범석은 오히려 '필요한 손실'에 과감하게 투자한다.
성장사업 부문을 보면 이를 명확히 알 수 있다. 매출은 11억 9,000만 달러로 33% 성장했지만, 조정 EBITDA는 -2억 3,500만 달러로 손실폭이 확대되었다. 그럼에도 김범석은 투자를 줄이지 않았다.
그는 단기 수익 극대화보다 장기 신뢰 구축을 우선시한다. 많은 플랫폼이 광고 수익에 집중할 때 쿠팡은 '직매입 + 풀필먼트'라는 무거운 길을 선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플랫폼 수수료로 단기 수익을 올릴 수 있지만, 그보다는 고객 경험을 통한 장기 충성도 확보에 집중한다.
이는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와 닮아있다. 하지만 차이점도 있다. 베조스가 규모의 경제를 추구했다면, 김범석은 '경험의 경제'를 추구한다. 고객의 기대치를 지속적으로 높여서 쿠팡 없이는 살 수 없게 만드는 전략이다.
데이터 해석의 천재성
김범석의 네 번째 특징은 숫자 해석 능력이다. 그는 표면적 지표가 아닌 '숫자 뒤의 스토리'를 읽어낸다.
예를 들어 고객 성장률 10%라는 지표를 볼 때, 일반적으로는 '고객이 늘었다'고 해석하겠지만, 김범석은 '고객의 생활 패턴이 바뀌었다'고 본다. 실제로 그는 "모든 고객 코호트에서 지속적 강한 성장"이라는 데이터에서 고객 충성도의 구조적 변화를 읽어냈다.
신규 고객이 기존 고객의 성장 패턴을 따라간다는 것은 쿠팡이 '학습 가능한 습관'을 만들어냈다는 의미다. 이는 단순한 서비스 이용이 아닌 생활방식의 변화를 의미한다.
로켓프레시 매출 25% 증가도 같은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신선식품이라는 가장 까다로운 영역에서의 성공은 쿠팡이 고객의 일상 깊숙이 침투했다는 신호다.
GPU 사업 도전: 아시아 진출을 위한 기술적 대비책
김범석의 다섯 번째 특징은 기술에 대한 접근 방식이다. 그에게 AI는 단순한 비용 절감 도구가 아닌 '능력 증폭기'다.
실적 발표에서 언급된 "생성형 AI로 코드 작성 50% 달성"은 단순한 자동화가 아니다. 이는 쿠팡의 DNA 자체를 업그레이드하는 과정이다. 효율성이 아닌 창조성의 원천으로 AI를 활용한다는 의미다.
이와 더불어, 김범석의 여섯 번째 특징은 '미래 준비를 위한 현재의 투자'다. 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정부의 1조 4,600억원 규모 GPU 사업 참여였다.
2025년 6월, 쿠팡은 업계를 놀라게 했다. 기존 클라우드 컴퓨팅 인프라 사업을 영위하던 기업들 외에도 유통사인 쿠팡이 참여했다는 데에 업계가 술렁이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네이버클라우드, 카카오, NHN클라우드와 함께 GPU 1만장 확보 사업에 뛰어든 것이다.
결과적으로 쿠팡을 제외한 3개 사업자가 총 1만3천여장의 물량을 나눠서 확보하게 됐다. 하지만 쿠팡의 GPU 사업 참여는 단순한 정부 프로젝트 수주가 아니었다. 이는 김범석의 더 큰 그림을 위한 포석이었다.
업계 관계자들은 쿠팡의 GPU 사업 참여를 두고 "단순한 정부 사업 참여를 넘어 본격적인 클라우드 서비스 제공사(CSP)로의 전환을 준비하는 전략적 수"로 해석했다. 특히 아마존은 본래 자사 유통 서비스를 위해 데이터센터를 구축했다가, 유휴 자원의 효율화를 위해 이를 외부에 개방하면서 클라우드 사업 AWS를 출범시켰다는 점에서 쿠팡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한국의 상대적으로 저렴한 전기요금도 김범석의 계산에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GPU 집약적 AI 컴퓨팅에서 전력비용은 핵심 경쟁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는 김범석이 단순히 한국 내 GPU 사업만을 노린 것이 아니라, 아시아 진출을 위한 기술 인프라 확보 차원에서 접근했음을 시사한다.
더 중요한 것은 타이밍이다. 대만에서의 성공을 발판으로 동남아시아 진출을 준비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GPU 기반 AI 역량 확보는 필수적이다. 각국의 언어, 문화, 소비패턴을 AI로 분석하고 최적화하려면 강력한 컴퓨팅 파워가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비록 이번 GPU 사업 수주에는 실패했지만, 김범석에게 이는 하나의 학습 과정이었을 것이다. 그의 사고방식을 고려할 때, 이미 차선책과 차차선책을 준비해뒀을 가능성이 높다. 자체 GPU 인프라 구축이나 해외 클라우드 파트너십 등을 통해 같은 목표를 달성하려 할 것이다.
글로벌 확장의 청사진
이 모든 특징들이 종합되어 나타나는 것이 김범석의 궁극적 비전이다. 그는 '아시아의 아마존'을 꿈꾸고 있지만, 그 접근법은 독특하다.
아마존이 미국에서 세계로 확산하며 카테고리별 순차 확장을 통해 규모의 경제를 추구했다면, 김범석은 한국에서 완벽한 모델을 구축한 후 문화적 유사성이 높은 아시아부터 공략하며 경험의 차별화로 승부한다.
현재 쿠팡의 시가총액은 약 385억 달러 수준이지만, 일부 투자은행들은 800억~850억 달러 밸류에이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만약 김범석이 현재의 운영 레버리지와 마진 구조를 유지하며 글로벌 확장에 성공한다면, 이는 충분히 현실화될 수 있는 목표다.
장기적인 탐욕을 가진 완벽주의자
김범석의 뇌구조를 한 문장으로 정의하면 '장기적 탐욕을 가진 완벽주의자' 처럼 보인다. 그는 단기 손실을 두려워하지 않지만 장기 실패는 용납하지 않으며, 고객 만족을 추구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시장 독점을 꿈꾸고, 혁신을 외치지만 실행에서 승부한다.
GPU 사업 참여와 탈락도 마찬가지다. 그에게 이번 경험은 실패가 아닌 아시아 AI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정찰전이었다. 정부 사업에 의존하지 않고도 같은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대안적 경로를 이미 준비해뒀을 것이다.
2025년 2분기 실적은 그저 숫자가 아니다. 그것은 김범석이라는 한 인간의 꿈과 집착, 그리고 치밀한 계산이 숫자로 구현된 예술 작품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쿠팡이 아시아를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가 쿠팡을 선택하게 만드는 것. 이것이 김범석이 그리는 미래다. 그리고 지금 그가 구축하고 있는 것은 단기 수익이 아닌, 수익을 조절할 수 있는 시스템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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