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설계자가 바뀌고 있다 '플랫폼 시대의 건설업'

연재: 물류·공간·일상의 재편을 말하다 (제2화)

■ 기술과 공간의 충돌

2024년 현대건설이 경기도 고양시 힐스테이트 라피아노 삼송에서 선보인 자율주행 로봇 배송 서비스는 건설업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건설사 최초로 도로부터 공동출입문, 엘리베이터, 각 세대 현관까지 전 구간 이동이 가능한 실내외 통합 로봇 배송 서비스를 구현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혁신적 서비스 이면에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있다. 로봇이 자유롭게 이동하려면 평지 설계, 단차 제거, 통신 인프라, 엘리베이터 연동 시스템 등 수많은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한다. 현실적으로는 아직 완전한 통합 서비스보다는 단계적 접근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단순한 기술적 문제가 아니다. 도시를 설계하는 주체와 도시를 실제로 움직이는 주체가 달라지고 있다는 더 본질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과연 미래 도시의 진짜 설계자는 누구일까?

■ 데이터가 만드는 새로운 공간 질서

플랫폼 기업들이 도시 공간을 바라보는 방식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들은 '거점-데이터-동선'이라는 새로운 언어로 도시를 재구성하고 있다.

배달의민족 B마트의 경우, 2018년 초기 수작업 방식에서 벗어나 IT기술과 물류 인프라를 접목한 결과 2023년 상품매출이 6880억원으로 전년 대비 34% 증가했다. 이는 단순한 매출 증가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소비자 데이터 분석을 통해 최적의 물류 거점을 배치하고, 기존 상권 개념을 뛰어넘는 새로운 공간 배치를 만들어낸 것이다.

쿠팡 역시 외곽 대규모 물류센터와 도심 마이크로허브를 연결하는 계층적 배송망을 구축했다. 강남역 지하상가의 픽업 라커부터 아파트 단지의 새벽배송 거점까지, 도시의 모든 틈새 공간이 물류 네트워크의 일부가 되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사람의 편의'보다 '알고리즘의 효율'을 공간 설계의 핵심 원칙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배송 시간 단축, 재고 회전율 극대화, 동선 최적화가 물리적 공간 구성을 결정한다. 결과적으로 도시는 사람이 살기 편한 곳이 아니라 물건이 빠르게 이동하기 편한 곳으로 변화하고 있다.

■ 건설업계의 대응과 한계

이런 변화에 건설업계도 대응하고 있지만, 여전히 '따라가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

현대건설의 로봇 배송 서비스는 커뮤니티 시설 내 물류센터를 거점으로 각 세대 현관문 앞까지 배송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혁신적인 시도이지만, 기존 건물 구조를 크게 바꾸지 않고 로봇 기술만 도입한 방식이라는 한계가 있다.

DL이앤씨의 '아크로', 포스코이앤씨의 '더샵' 등 다른 건설사들 역시 IoT 센서와 앱 연동 수준의 스마트 기능을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기존 건축 설계에 기술을 덧씌우는 방식으로, 플랫폼 기업들이 만들어내는 근본적인 공간 혁신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반면 삼성물산은 '홈닉(Homeniq)' 플랫폼을 통해 아파트 생활 전반을 디지털화하고, 수집한 데이터로 새로운 서비스를 개발하는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단순히 집을 짓는 것을 넘어 거주자의 라이프스타일을 플랫폼화하려는 시도다.

■ 수익 모델의 근본적 변화

건설업계가 직면한 가장 큰 과제는 수익 모델의 변화다. 과거 '땅을 사고, 건물을 짓고, 분양하는' 단순한 구조에서 벗어나, 건물을 짓는 것이 시작일 뿐인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 전환해야 한다.

입주민들의 생활 패턴, 서비스 이용 데이터, 지속적인 관리 서비스가 더 중요한 수익원이 되고 있다. 커뮤니티 시설 예약부터 주차 관리, 택배 수령, 생활 편의 서비스까지 아파트 자체가 하나의 '플랫폼'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전환은 쉽지 않다. 건설업계는 여전히 '건물 짓기'에 특화된 조직 구조를 갖고 있다. 소프트웨어 개발, 데이터 분석, 서비스 운영 역량은 부족한 상황이다. 결국 외부 기술 기업과의 협업이 필수적인데, 이 과정에서 주도권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가 핵심 과제다.

■ 정부 정책의 방향성

정부도 이런 변화를 인식하고 대응하고 있다. 국토교통부의 '스마트시티 로드맵'에는 생활물류 거점 확보가 핵심 과제로 포함되어 있다. 새로운 신도시 개발 단계부터 물류 동선과 배달 친화적 설계를 반영하겠다는 방향이다.

세종시 5-1생활권에서는 아파트 단지 설계 단계부터 드론 착륙장, 로봇 전용 통로, 무인 배송함 설치 공간을 확보하는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단지 내 상업시설도 기존 '근린생활시설' 개념을 넘어 '마이크로 물류허브'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계획되고 있다.

김포한강신도시에서는 지상은 사람을 위한 공간, 지하는 물류를 위한 공간으로 구분하는 '투트랙 도시 설계'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플랫폼 기업이 원하는 효율적 배송망과 주민이 원하는 쾌적한 생활환경을 동시에 만족시키려는 절충안이다.

■ 시민과 프라이버시의 관점

하지만 이런 변화 과정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시민들의 선택권과 프라이버시 보호다.

플랫폼 기업들이 만드는 효율적 도시는 동시에 감시와 통제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모든 이동 경로가 데이터로 축적되고, 소비 패턴이 분석되며, 생활 리듬이 알고리즘에 의해 예측되는 도시에서 시민들의 자유는 어떻게 보장될 수 있을까?

또한 디지털 격차 문제도 중요하다. 스마트 기술에 익숙하지 않은 고령자나 디지털 소외계층이 새로운 도시 시스템에서 배제되지 않도록 하는 방안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  해외 사례에서 배우는 교훈

싱가포르의 '스마트 네이션' 프로젝트는 정부 주도로 도시 전체를 디지털 플랫폼화한 사례다. 도시 전체에 센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교통부터 에너지, 폐기물 관리까지 통합 관리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시민들의 프라이버시 우려와 정부 감시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순환 도시' 프로젝트는 지속가능성을 중심으로 한 도시 설계의 새로운 모델을 보여준다. 건물 자재부터 물류 시스템까지 모든 것을 순환 경제 원리로 설계해, 효율성과 환경성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 협력 모델의 필요성

결국 미래 도시는 단일 주체가 아니라 여러 주체가 협력하는 '분산형 설계' 모델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 건축가는 물리적 공간을, 플랫폼 기업은 서비스 흐름을, 건설사는 이 둘을 연결하는 통합 시스템을 설계하는 역할 분담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건설업계가 이런 협력 구조에서 단순한 하청업체가 아니라 동등한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플랫폼 기업이 원하는 효율적 서비스 구현과 시민이 원하는 쾌적한 생활환경, 그리고 정부가 추구하는 공공성 사이의 균형점을 찾는 것이 건설업계의 새로운 역할이다.

■ 지속가능한 도시를 위한 과제

미래 도시 설계에서 또 하나 중요한 고려사항은 지속가능성이다. 플랫폼 기업의 효율성 추구가 환경 부담을 늘리거나 사회적 불평등을 심화시켜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빠른 배송을 위한 물류 네트워크 확장이 도시의 탄소 발자국을 늘리거나, 로봇 친화적 설계가 장애인이나 고령자의 접근성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 기술의 발전이 모든 시민의 삶의 질 향상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스마트 시티'의 목표여야 한다.

도시의 미래 설계자는 바뀌고 있다. 과거 건축가와 도시계획가가 주도하던 방식에서 플랫폼 기업, 건설사, 정부, 시민이 함께 참여하는 다중심적 모델로 전환되고 있다.

이런 변화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이다. 중요한 것은 각 주체가 자신의 전문성을 살리면서도 다른 주체들과 협력할 수 있는 새로운 거버넌스 모델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플랫폼 기업은 데이터와 알고리즘 최적화를, 건설업계는 물리적 공간 설계와 시공 기술을, 정부는 공공성과 규제 정책을, 시민은 실제 생활 경험과 사회적 가치를 각각 기여하는 협력 체계가 필요하다.

미래 도시는 효율성만 추구하는 플랫폼 도시도, 편의성만 강조하는 전통적 도시도 아닌, 기술의 혁신과 인간의 삶의 질, 환경의 지속가능성을 모두 고려한 '균형잡힌 도시'가 되어야 한다.

이제 중요한 것은 누가 도시를 설계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함께 더 나은 도시를 만들어갈 것인가다. 그 답은 상호 협력과 지속적인 대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삼성물산의 주거 생활 플랫폼 '홈닉(Homeniq)' 시스템 구성도. 스마트폰 앱을 통해 클라우드와 허브를 거쳐 조명, 커튼 등 집안의 다양한 기기를 제어한다. 출처: 삼성물산
현대건설의 엔지니어가 건설 현장에서 스마트 로봇과 함께 작업하고 있다. 이는 건설 프로세스의 자동화와 플랫폼화를 보여주는 사례다. 출처: 현대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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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 물류 주거단지의 미래_건설사와 택배사 협업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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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순서] 물류·공간·일상의 재편을 말하다

프롤로그 「아마존이 우리 동네에 아파트를 설계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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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물류가 공간을 삼키고 있다: '동선'에서 '흐름'으로」

물류가 공간을 삼키고 있다. ‘동선‘에서 ‘흐름’으로
연재: 물류·공간·일상의 재편을 말하다(제1화)얼마 전 서울 강남구 한 아파트 단지에서 목격한 장면이다. 배달앱으로 주문한 치킨이 건물 1층 로비에서 배송 로봇에게 전달되고, 이 로봇이 승강기를 타고 올라가 현관 앞에 도착한다. 그런데 같은 건물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온 다른 배달 기사는 지하 화물용 승강기만 이용하라는 제약을 받는다. 같은 공간,

제2화 「"도시의 설계자가 바뀌고 있다" 플랫폼 시대의 건설업」

제3화 「"건설사는 무엇을 설계해야 하는가" 플랫폼 도시의 카운터파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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