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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송은 되는데, 투표는 안 되는 이상한 나라

김철민
김철민
- 9분 걸림

물류·공급망 전략 백브리핑

STREAMLINE: "대한민국 민주주의는 아직 배송 중" 물류 노동자의 참정권 사각지대

(2025.05.30)


새벽 4시, 멈추지 않는 사람들

대한민국 물류를 움직이는 수많은 사람들은 선거일이 와도 쉽게 투표할 수 없습니다. 365일, 24시간 작동하는 산업 구조 속에서 참정권은 여전히 법과 제도의 사각지대에 머물러 있습니다.

택배기사, 화물차 운전사, 항공화물 조종사, 항만 하역 노동자들. 이들의 손끝에서 우리의 일상이 돌아갑니다. 새벽에 주문한 물건이 오후에 도착할 수 있는 것도 이들이 밤을 지새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선거일이 되면 어김없이 반복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투표요? 갈 수가 없어요.”


반복되는 ‘택배 없는 날’의 딜레마

선거일이 다가오면 '택배 없는 날'이 뉴스가 됩니다. 2025년 대선을 앞두고도 정치권은 택배업계에 휴무를 요청했고, 주요 택배사와 쿠팡은 주간 배송을 중단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이 조치는 법적 의무가 아닌 자율 협의의 결과였습니다. 2022년 대선, 2024년 총선에 이어 또다시 반복된 ‘극적 타결’. 왜 매번 마지막 순간까지 이런 논의가 필요할까요?

제도화되지 않은 참정권 보장은 그때그때 조정하고 설득해야 하는 일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숫자로 본 참정권의 사각지대

물류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결코 소수가 아닙니다. 전국의 택배기사는 약 6만 명, 특수고용·플랫폼 노동자는 약 860만 명에 달합니다. 이들 중 상당수가 법적 보호 없이 일하고 있습니다.

근로기준법과 공직선거법은 투표 시간을 보장하라고 명시하지만, 적용 대상은 '근로자'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즉, 계약상 '도급'으로 일하는 특수고용직이나 플랫폼 노동자는 포함되지 않습니다. 법은 있지만, 실질적인 권리는 보장되지 않는 셈입니다.


세계는 다르게 움직이고 있다

다른 나라들은 참정권 보장을 법과 제도로 구조화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28개 주와 워싱턴 D.C.에서 유급 투표 시간을 법으로 보장하며, 사전투표 기간은 평균 19일에 달합니다. 캘리포니아, 뉴욕, 콜로라도에서는 1~3시간의 유급 투표 시간이 보장됩니다.

캐나다는 고용주가 선거 당일 최소 3시간의 연속된 투표 시간을 보장하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오전 11시부터 오후 7시까지 근무하는 직원이 있다면, 반드시 시간을 조정해야 합니다.

독일과 프랑스는 선거일 자체를 일요일로 지정해 노동자들의 투표권 침해 가능성을 최소화합니다. 여기에 더해 우편투표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기업도 변하고 있다. 그러나 충분하지 않다

글로벌 기업들도 직원의 투표권을 보장하기 위한 노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케아는 주 20시간 이상 근무하는 모든 직원에게 유급 투표 시간을 제공합니다. "누구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투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철학에 기반한 조치입니다.

2,000개 이상의 기업이 참여한 ‘Time to Vote’ 캠페인도 같은 맥락입니다. 참정권은 선택이 아닌 책임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반면, 한국의 상황은 다릅니다. 쿠팡은 백업 제도를 통해 퀵플렉서들이 자유롭게 휴가를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2023년 '택배 없는 날'에도 유일하게 정상 배송을 강행했습니다. 자율에만 의존한 조치는 업계 전체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측면에서 한계를 드러냅니다.


법은 있지만, 권리는 없다

현행 근로기준법과 공직선거법은 선거권 행사를 위한 시간을 보장하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근로자’에게만 적용됩니다. 특수고용직, 플랫폼 노동자들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이들은 정규직처럼 일하지만 계약은 도급 형식입니다. 화물차 운전기사, 택배기사, 통신업체 설치기사 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처럼 수백만 명이 실질적인 참정권에서 배제되어 있는 현실은 단순한 행정적 문제를 넘어, 구조적 결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꾸기 위한 세 가지 축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기술, 제도, 기업 문화 세 가지 축에서 변화가 필요합니다.

먼저 기술적으로는 사전투표 기간을 확대하고 모바일·우편투표 도입 가능성을 검토해야 합니다. 현재 한국의 사전투표는 이틀뿐이지만, 미국은 평균 19일 동안 사전투표가 가능합니다. 24시간 교대근무 체제에서 단 이틀은 매우 부족합니다.

제도적으로는 특수고용직을 포함한 참정권 보장 법률 제정이 시급합니다. 투표 시간을 보장하지 않으면 제재가 가능한 실질적 조치도 함께 마련되어야 합니다. 선거일을 일요일로 정하거나, 실질적으로 쉬는 날로 만들기 위한 제도 설계도 검토가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기업도 변화해야 합니다. 유급 투표 시간 제도화, 참정권 보장 기업의 ESG 인증 연계, 업계 전체의 공동 가이드라인 마련 등이 필요합니다.


투표는 존재 확인이다

투표는 단순한 정치 참여가 아닙니다. 사회의 일원으로서 ‘나는 여기에 있다’는 출석체크입니다. 노동자는 단지 ‘일하는 사람’이 아닌 ‘사는 사람’입니다. 이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으로서, 당연히 자기 삶을 결정할 권리가 있습니다.

“오늘은 배송이 늦을 수 있습니다”라는 안내문이 어색하지 않은 하루. 그것이 모든 시민이 투표하는 날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품질, 지금 점검할 때

대한민국은 이미 물류 의존도가 매우 높은 사회입니다. 코로나19 이후 비대면 소비가 일상화되고, 새벽배송과 당일배송은 선택이 아닌 기본이 되었습니다. 물류는 멈출 수 없는 필수 인프라가 되었지만, 정작 그 인프라를 지탱하는 사람들은 투표장에 갈 수 없습니다.

이 문제는 단순한 불편이 아닙니다.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는 지점입니다. 한 표를 행사할 수 없는 시민이 수백만 명이라면, 그것은 민주주의의 품질 문제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

이제는 방향이 명확합니다.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기술을 활용하며, 산업 구조를 개선하고, 사회적 공감대를 만들어야 합니다.

  1. 특수고용직을 포함한 참정권 보장 법률 제정
  2. 사전투표 확대와 모바일·우편투표 도입
  3. 유급 투표 시간 제도화 및 업계 공동 가이드라인 마련
  4. 배송 지연을 이해하고, 권리를 보장하는 기업을 응원하는 소비자 행동

배송 완료 vs 민주주의 배송 중

“물건은 제때 도착해야 좋고, 사람은 제때 참여할 수 있어야 건강한 사회입니다.”

한 상자의 배송을 위해 수십 명이 움직이는 것처럼, 그들의 한 표 역시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힘입니다.

우리가 ‘배송 지연’을 이해할 수 있다면, ‘투표 지연 없는 사회’도 함께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물류는 멈추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아직 배송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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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민

『네카쿠배경제학』의 저자이자, 유통 물류 지식 채널 비욘드엑스 대표입니다. 인류의 라이프스타일이 물류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며, 공급망의 진화 과정과 그 역할을 분석하는 데 전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통령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 위원으로서 국가 물류 혁신 정책 수립에 기여한 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