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존이 우리 동네 아파트를 설계하기 전에

연재: 물류·공간·일상의 재편을 말하다(프롤로그)

매일 아침 7시, 아파트 현관 앞에 놓인 택배 상자들. 점심시간 사무실 로비로 몰려드는 배달 오토바이들. 밤 11시, 스마트폰 화면을 넘기며 내일 아침에 받을 생필품을 주문하는 손길들. 이 일상적인 풍경 뒤에 숨겨진 숫자가 있다. 하루 평균 1,400만 개. 대한민국에서 매일 움직이는 택배 상자의 개수다.

이 수치가 의미하는 건 단순한 물류량 증가가 아니다. 우리가 직접 움직여야 했던 1,400만 번의 이동이 택배차와 배달 오토바이로 대체되었다는 뜻이다. 사람의 이동 패턴이 바뀌면서, 도시 자체가 다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도시는 건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동'으로 완성된다. 그리고 지금, 그 이동을 설계하는 주체는 더 이상 건축가나 도시계획가가 아니다.

■ 플랫폼이 먼저 흐름을 만들고, 건설이 뒤따른다

쿠팡은 단 한 번도 "우리가 도시를 바꾸겠다"고 선언한 적이 없다. 배달의민족도 도시계획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없다. 그들은 단지 더 빠르고 편한 서비스를 약속했을 뿐이다.

하지만 결과를 보자. 로켓배송이 시작되자 동네 마트의 진열대가 줄어들었다. 새벽배송이 대중화되자 주거단지마다 냉장 택배보관함이 필수가 되었다. 배달앱이 일상화되자 식당들은 홀 공간을 줄이고 주방을 확장했다.

플랫폼들이 생활의 '흐름'을 먼저 설계했고, 도시 공간이 그 흐름에 맞춰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전통적인 도시 개발에는 명확한 순서가 있었다. 정부가 도시를 계획하고, 건설사가 건물을 짓고, 상점과 주민이 입주해서 도시가 완성되었다. 그런데 지금은 순서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플랫폼이 새로운 서비스를 시작하고, 사람들의 생활 패턴이 바뀌고, 그제야 건설사가 그 변화에 맞춰 공간을 설계한다.

■ 숫자로 본 조용한 혁명

이 변화가 얼마나 빠르고 광범위한지 숫자로 확인해보자. 온라인 쇼핑은 2020년 대비 2023년 거래액이 78% 증가했다. 배달 주문은 코로나 이후 3배 이상 증가해 지금도 계속 늘고 있다. 반면 대형마트 매출은 연속 감소하고 점포 수도 줄어드는 추세다.

이 수치들이 보여주는 것은 단순한 시장 변화가 아니다. 도시 생활의 기본 구조가 바뀌고 있다는 증거다. 우리가 마트에 가던 시간에 이제는 앱을 보고, 식당에 앉아 먹던 음식을 집에서 배달로 주문한다. 사람이 움직이던 자리를 택배차와 배달 오토바이가 채우면서, 도시의 교통 흐름과 공간 수요가 근본적으로 달라진 것이다.

■ 세계는 이미 다음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이런 변화에 대한 대응은 한국만의 과제가 아니다. 주요 도시들과 기업들은 이미 새로운 접근 방식을 실험하고 있다.

중국의 알리바바는 '신유통(新零售)' 전략으로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완전히 통합한 새로운 상업 생태계를 만들고 있다. 일본의 도요타는 시즈오카현에 '우븐 시티(Woven City)'를 건설하고 있다. 자율주행차, 로봇, AI가 통합된 환경에서 인간의 이동과 생활 패턴을 완전히 새롭게 설계하는 실험 도시다.

유럽의 파리와 바르셀로나는 '15분 도시' 개념을 도입했다. 걸어서 15분 안에 필요한 모든 시설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도시를 재구성해서, 플랫폼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지역 공동체를 강화하려는 시도다.

이제 도시 실험을 주도하는 것은 건설사가 아니라 테크기업이다.

■ 건설업계에 던져진 근본적 질문

이런 시대에 한국의 건설사들은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할까? 기존의 질문은 "얼마나 크게, 얼마나 많이 지을 것인가"였다. 새로운 질문은 "어떤 생활의 흐름을 담아낼 것인가"다.

플랫폼들이 만든 새로운 생활 패턴을 이해하고, 그에 맞는 공간을 먼저 제안할 수 있다면, 건설사는 더 이상 '반응자'가 아닌 '제안자'가 될 수 있다. 즉, 기술과 생활 흐름을 이해하는 '도시 생활의 설계 파트너'로 진화할 수 있는 것이다.

■ 편리함과 위험 사이에서

물론 플랫폼이 가져온 변화가 모두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플랫폼 서비스가 잘 되는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 사이의 생활 편의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 골목상권의 작은 가게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그 자리를 무인 픽업함과 다크키친이 대체하고 있다.

폭증한 택배 물량으로 아파트 엘리베이터는 상시 정체되고, 배달 오토바이로 인한 교통 혼잡과 안전 문제도 심각해지고 있다. 무엇보다 우리의 선택권이 제한되고 있다. 플랫폼이 제시하는 옵션 안에서만 생활하게 되면서, 진정한 의미의 도시 다양성이 사라지고 있다.

■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다

우리는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 아마존, 알리바바 같은 글로벌 플랫폼이 한국 도시의 설계권을 완전히 가져가기 전에, 우리 손으로 새로운 도시 모델을 만들어낼 것인가? 아니면 계속해서 플랫폼의 흐름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면서, 결국 도시의 주도권을 내어줄 것인가?

건설은 더 이상 단순한 공간의 공급자가 아니라, '삶의 패턴'을 이해하고 설계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변화를 만들어갈 시간은, 바로 지금이다.

도시는 벽돌과 콘크리트의 집합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과 흐름이 만나는 유기체다. 누가 그 흐름을 설계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내일이 달라진다.


[연재 순서]  물류·공간·일상의 재편을 말하다

프롤로그 「아마존이 우리 동에 아파트를 설계하기 전에」

제1화 「물류가 공간을 삼키고 있다: '동선'에서 '흐름'으로」

제2화 「"도시의 설계자가 바뀌고 있다" 건설사에 플랫폼으로」

제3화 「“건설사는 무엇을 설계해야 하는가” 플랫폼 도시의 카운터파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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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류, 공간, 일상의 재편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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