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천 127번의 시도, 디자인으로 세상을 바꾸다
나건 부산광역시 총괄디자이너가 말하는 물류 산업을 위한 디자인 사고의 힘
"실패라고요? 저는 그저 작동하지 않는 5,126가지 방법을 발견했을 뿐입니다."
영국의 발명가이자 기업가인 제임스 다이슨은 먼지봉투가 없는 사이클론 진공청소기를 개발하는 데 5,127번의 시도를 거쳤다. 5,126번의 실패 후에야 세상을 바꾼 혁신이 탄생했다. 이것이 바로 디자인 사고의 본질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며, 관찰과 공감을 통해 진정한 해결책을 찾아내는 과정.
나건 부산광역시 총괄디자이너(동서대학교 석좌교수)는 이러한 디자인 사고의 원칙이 물류 산업의 혁신적 변화를 이끌 수 있다고 강조한다. "디자인은 기존 상황을 선호하는 상황으로 바꾸기 위한 행동 과정을 고안하는 것입니다." 이 정의는 단순한 미학적 접근을 넘어, 비즈니스 문제 해결의 핵심 방법론으로서의 디자인을 제시한다.
연결에서 시작되는 창의성
"서로 상관없어 보이는 것들을 섞어 새로운 것을 만드는 능력." 나건 디자이너는 창의성을 이렇게 정의한다. 이는 빈 종이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닌, 기존 요소들을 새롭게 조합하는 '융합'의 과정이다.
대부분의 물류 기업들이 직면한 문제는 '아이디어 부족'이 아니라 '서로 다른 영역 간의 단절'이다. 현장 운영자, 정보기술 개발자, 데이터 분석가, 고객 서비스 담당자들이 각자 다른 언어로 소통하며 문제를 바라본다. 이 간극을 메우는 것이 바로 디자인 사고의 출발점이다.
DHL은 이러한 융합적 접근법의 전형을 보여준다. DHL 혁신 센터에서는 다양한 배경의 전문가들이 모여 디자인 사고 워크숍을 진행한다. 특히 DHL의 '비전 피킹' 증강현실 시스템은 정보기술 전문가, 창고 작업자, 사용자 경험 디자이너의 협업으로 탄생했다. 스마트 글래스를 착용한 작업자에게 실시간으로 정보와 방향을 제공함으로써 작업 정확도를 25% 향상시켰고, 특히 신규 작업자의 적응 시간을 50% 단축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성공적인 융합의 비결로 나건 디자이너는 'BED'를 언급한다. '반쯤 자고 반쯤 깬 상태', 즉 뇌가 이완된 상태인 세타파(4–8Hz)와 알파파(8–12Hz) 구간이 창의성 유도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들이 일부 존재한다. 이러한 '느슨한 사고'는 공식 회의가 아닌 워크숍 형태의 자유로운 대화를 통해 서로 다른 분야의 지식과 경험을 연결할 때 가장 효과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창의성을 넘어 혁신으로
나건 디자이너에 따르면, 창의성과 혁신은 같지 않다. 창의성이 새로움을 생각해내는 능력이라면, 혁신은 그것에 '엄청나게 큰 가치'를 더하는 과정이다. "혁신 = 창의성 + 가치" 공식에서 핵심은 가치의 창출이다.
아마존의 '프라임 데이' 서비스는 단순한 빠른 배송이 아니라, 고객 경험의 완전한 재설계다. 한 번의 클릭으로 주문부터 익일 혹은 당일 배송까지, 아마존은 배송의 모든 접점을 고객 중심으로 디자인했다. 특히 아마존의 포장 디자인은 환경 친화적이면서도 브랜드 경험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불편함 없는 포장'이라는 계획을 통해 2008년부터 2021년까지 포장재를 11억 파운드 이상 줄이면서도, 제품 손상률을 24% 감소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나건 디자이너는 "매력적인 것이 더 잘 작동한다"는 원칙을 강조한다. 외관이 매력적인 제품은 사용자에게 긍정적 감정을 유발하고, 이는 문제 해결 능력을 향상시킨다는 것이다. 물류 현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작업자가 사용하기 편리하고 시각적으로 명확한 사용자 화면은 실수를 줄이고 작업 만족도를 높인다.
디자인의 세 가지 차원
디자인의 핵심 요소는 세 가지다. "보기 좋고, 쓰기 좋고, 사용한 후에도 기분 좋은 것." 나건 디자이너는 이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완성도 높은 디자인이 된다고 강조한다.
UPS의 'ORION' 경로 최적화 시스템은 이러한 디자인 원칙을 물류 영역에 성공적으로 적용한 사례다. 대규모 데이터와 고급 알고리즘을 활용해 배송 경로를 최적화하는 이 시스템은 단순한 효율성 증대를 넘어, 기사의 업무 경험과 고객 만족도까지 고려한 총체적 디자인이다. UPS는 ORION을 통해 연간 약 400만 갤런의 연료를 절약하고, 배송 거리를 1억 마일 이상 줄이면서도, 동시에 배송 정확도와 고객 만족도를 향상시켰다.
나건 디자이너는 도널드 노먼의 디자인 3단계론을 인용한다. "척(만져)보니 좋고, 사용해 보니 좋고, 사용한 후에도 좋은" 경험의 연속성이 진정한 디자인 성공이라는 것이다. 물류 체인의 모든 접점에서 이러한 경험 연속성을 확보할 때, 차별화된 경쟁력이 생긴다.
성공적 소통의 비결
"소통은 공유다." 나건 디자이너는 소통의 본질을 정의하며, 특히 '이해'의 어원을 강조한다. '아래에 서서 바라본다'는 의미로, 소통의 핵심은 상대방의 관점을 받아들이는 공감에 있다는 것이다.
페덱스의 '센스어웨어' 플랫폼은 이러한 공감적 접근의 결과물이다. 이 플랫폼은 온도, 습도, 빛 노출, 충격 등 화물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는 시스템으로, 단순한 위치 추적을 넘어 고객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정보를 제공한다. 의약품, 의료장비, 정밀기기 등 민감한 화물을 운송하는 고객들의 불안감을 해소하고, 예외 상황에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이 서비스는 고객의 실제 필요와 두려움에 공감함으로써 개발되었으며, 결과적으로 고객 만족도 증가와 사후 클레임 발생 가능성 감소에 기여했다.
나건 디자이너는 "다양한 관점의 이해와 자신을 가두는 투명 박스 찾기"를 강조한다. 자신도 모르게 갇혀있는 사고의 틀, 즉 암묵적 편향을 인식하고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창의성의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물류 기업의 경우, "우리는 항상 이렇게 해왔다"는 관행적 사고가 혁신의 가장 큰 장애물이 될 수 있다.
‘세심한 관찰’ 혁신의 첫걸음
"복제는 발명의 첫 단계다." 나건 디자이너는 관찰과 모방이 혁신의 첫 단계임을 강조한다. 이는 물류 산업에서 특히 중요한 메시지다. 타 산업의 우수 사례를 면밀히 관찰하고 적용하는 능력이 새로운 지평을 열기 때문이다.
아마존의 배송 경험 디자인은 이러한 세심한 관찰에서 시작됐다. 아마존은 주문에서 배송, 반품에 이르는 전체 과정을 수십 개 이상의 고객 접점으로 세밀하게 관리하며 지속 개선하고 있다. 특히 고객이 실제로 패키지를 열어보는 과정(언박싱 경험, Unboxing Experience)을 관찰하고 분석한 결과, '스마일 박스(Smile Box)'라는 브랜드 아이덴티티가 담긴 패키지를 개발했다. 이 디자인은 단순히 상자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쉽게 열리고, 환경 친화적이며, 아마존의 브랜드 이미지를 강화하는 다차원적 가치를 창출한다.
나건 디자이너는 "물류 혁신은 눈으로 보이는 기술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사람의 관점을 디자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물류센터의 동선(Movement Flow), 화물의 분류 체계(Sorting Taxonomy), 정보의 흐름(Information Flow)을 재설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의 경험과 필요를 세심하게 관찰하는 것이다.
제임스 다이슨의 5,127번의 시도는 단순한 끈기가 아니라,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의 결과였다. 그는 기존 진공청소기의 근본적인 문제(먼지봉투가 막히면서 흡입력이 저하되는 현상)를 관찰하고, 이에 대한 획기적인 해결책(사이클론 기술)을 찾아낸 것이다. 나건 디자이너는 이를 '관찰적 민감성(Observational Sensitivity)'이라 부르며, 성공적인 디자인 사고의 기초로 강조한다.
경험을 운송하는 물류의 미래
"디자인은 혁신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도구다." 나건 디자이너의 이 확언은 물류와 유통 산업에 새로운 도전과 기회를 제시한다. 물류는 더 이상 물건만 운송하지 않는다. 그것은 가치를 전달하고, 경험을 설계하고, 감정을 연결하는 총체적 프로세스다.
DHL의 파셀콥터 드론 배송 서비스는 이러한 미래 지향적 디자인 사고의 좋은 예다. DHL은 단순히 기술적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 산간 지역이나 섬과 같이 접근이 어려운 곳의 주민들에게 필수 물품을 신속하게 전달하는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2013년 첫 시범 운영 이후 지속적인 개선을 통해, 시험 운영 결과 최대 70km까지 배송이 가능했으며, 특히 의약품 배송 등 특수 목적 중심으로 시범 적용되고 있다.
성공적인 물류 기업은 단순히 효율적인 운송망을 갖춘 기업이 아니라, 고객과 직원의 경험을 세심하게 디자인하는 기업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기술적 혁신뿐 아니라, 사람 중심의 디자인 사고(Human-Centered Design Thinking)다.
나건 디자이너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물류의 미래는 물건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경험을 설계하는 것이다." 이제 물류 산업은 운송의 시대를 넘어, 경험 디자인의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디자인 사고로 물류의 미래를 그리다
물류와 유통 산업은 이제 새로운 도전과 기회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 고객 기대의 변화, 지속가능성 요구 등 복합적 변수 속에서, 디자인 사고는 혁신을 이끄는 핵심 방법론이 될 것이다.
나건 디자이너가 제시하는 디자인 사고는 단순한 아이디어 발상 기법이 아니라, 기업의 사고방식과 조직문화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철학이다. 그것은 우리가 문제를 정의하고, 사람을 이해하고, 해결책을 만들어가는 방식 자체를 재설계한다.
제임스 다이슨이 5,127번의 시도 끝에 혁신적인 진공청소기를 개발한 것처럼, 물류 산업의 혁신도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과정에서 탄생할 것이다. 나건 디자이너의 통찰이 물류 산업에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디자인은 미래를 위한 언어이며, 모든 비즈니스는 궁극적으로 사람을 위한 디자인이다."
이제 물류 기업들은 단순한 운송 서비스 제공자를 넘어, 의미 있는 경험을 설계하는 디자이너로 거듭나야 할 시점이다. 그리고 그 여정은 작은 시도와 실패를 반복하며, 문제를 새롭게 정의하는 데서 시작된다.
Who is. 나건 부산광역시 총괄디자이너
나건 총괄디자이너는 현재 부산광역시 총괄디자이너이자 동서대학교 석좌교수로 활동하고 있으며, 세계디자인기구(World Design Organization, WDO) 이사를 겸하고 있다. 홍익대학교 국제디자인전문대학원(IDAS)에서 디자인경영 교수로 20여 년간 재직했고, '세계디자인수도 서울 2010'과 '2023 광주디자인비엔날레'의 총감독을 역임하며 디자인 전략과 도시 브랜딩 분야에서 영향력을 넓혀왔다. 한양대학교 산업공학과를 졸업하고 KAIST 산업공학과에서 인간공학(Ergonomics) 석사, 미국 터프츠대학교에서 공학박사(Human Factors)를 취득했다. 대한민국디자인대상 근정포장을 수훈했고, Red Dot Award와 James Dyson Award의 심사위원으로도 오랜 기간 활동하며 글로벌 디자인 사고의 흐름을 선도해왔다.